1. 디지털 유산, 법적 개념조차 없는 현실
‘디지털 유산(Digital Legacy)’이란 사망자가 생전에 보유하거나 생성한 모든 온라인 자산과 정보를 말한다. 이메일, SNS 계정, 클라우드에 저장된 파일, 블로그, 유튜브 채널, 암호화폐 등이 이에 포함되며, 경우에 따라 경제적·사회적 가치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적 정의나 포괄적인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우리 민법은 상속 대상 자산을 "피상속인의 재산상 권리와 의무"로 규정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전통적인 물리적 자산 중심의 해석이 적용되어 왔다. 디지털 자산의 경우 물리적 실체가 없고, 대부분 서비스 제공자의 약관에 따라 운용되기 때문에 ‘상속 가능한 자산’으로 명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SNS 계정이나 게임 아이템은 약관상 소유권이 서비스사에 있으며, 이용자에게는 단지 ‘사용 권한’만 부여된다.
그 결과, 실제로 유족이 사망자의 계정이나 콘텐츠에 접근하려 해도 법적으로 명확한 절차가 없어, 플랫폼의 정책에 의존하거나 법원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자산은 법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제도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2. 디지털 유산 관련 국내 판례와 이슈
국내에서도 사망자의 디지털 자산에 대한 분쟁 사례가 점차 늘고 있으며, 몇몇 의미 있는 판례도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2021년 한 유족이 고인의 구글 계정에 저장된 사진 및 문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달라며 구글코리아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 있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유족의 권리를 인정해, 구글에 대해 ‘자료 제공을 위한 협조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판례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권리 인정을 명시한 첫 사례로, 이후 관련 논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별 사건에 따른 판결로서, 법률적으로 일반화되거나 표준화된 규정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플랫폼 기업은 여전히 약관을 근거로 사망자 계정 접근을 거부할 수 있으며, 유족은 매번 별도의 소송을 통해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구조다.
또한 일부 지방자치단체나 교육기관에서는 ‘디지털 유언장’이나 ‘사후 계정 관리’에 대한 캠페인을 시행하기도 했으나, 제도적 연계나 입법 추진까지 이어지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처럼 개별 사례나 일회성 조치에 머무르는 현 상황은, 결국 명확한 법 제도 없이 유족의 권리와 고인의 정보가 무력화되는 위험을 키운다.
3. 입법 추진 현황: 정체된 국회와 실무 공백
국내 국회에서도 디지털 유산 관련 입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몇 차례 관련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2021년과 2022년, ‘디지털 자산의 관리 및 상속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었고, 정보통신망법 및 전자문서법 개정안에서도 디지털 자산 관련 조항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들 법안은 대부분 상임위 심사조차 통과하지 못한 채 계류 중이거나 자동 폐기되었다.
입법이 지연되는 이유는 디지털 자산의 법적 성격이 복잡하고, 플랫폼 사업자의 권리, 이용자의 프라이버시, 유족의 접근권 사이의 충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인의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유족에게 접근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과, 유족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선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실제 현실은 방치되고 있다. 유족은 법적 근거 없이 기업의 약관에만 의존해야 하고, 플랫폼은 책임 회피를 이유로 일괄적인 거부 대응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며, 그 피해는 고인의 데이터가 통째로 소멸되거나, 상속인 간의 분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4. 디지털 유산 입법화를 위한 향후 과제
디지털 유산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 과제가 있다. 첫째, 디지털 자산의 개념을 민법 상속조항에 명확히 포함시켜야 한다. 기존 민법은 물리적 자산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디지털 콘텐츠나 계정, 온라인 수익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로운 조항을 신설하거나, 디지털 자산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민법 개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플랫폼 기업의 책임과 의무를 명시하는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 기업이 사망자의 계정이나 콘텐츠에 대해 일관된 정책을 운영하도록 법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용자 사망 시 유족의 계정 접근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 사전 설정 기능(디지털 유언장), 데이터 이전 요청 절차 등이 포함돼야 한다.
셋째, 디지털 유언장 제도의 공론화와 표준화가 요구된다. 현재는 일부 기업에서 제공하는 자체 기능(구글의 비활성 계정 관리자, 애플의 디지털 유산 접촉인 등)에 의존하고 있으나, 이는 개인의 설정 여부에 따라 효력이 좌우된다. 국가 차원의 공적 디지털 유언장 등록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하며, 이와 함께 공증, 법적 효력 부여, 상속자 지정 절차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디지털 유산은 더 이상 사적인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가 책임지고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정보화 시대의 사후 권리 보호는 곧 살아 있는 이들의 권리와도 연결되며, 국가는 이 새로운 상속 시대에 맞는 법적 틀을 조속히 완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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